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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고스란히 되찾아

러블리 아련 2009-11-06 조회수 2,343

나는
와인 맛을 이야기 할 때 탄닌이니 풀바디니.. 이런 것을 평할 줄 모른다
마찬가지로 커피의 맛을 이야기 할 때 첫 맛은 어떤 데 끝맛은 신맛이니 그런 거 모른다
단지 맛이 있다 없다. 숭늉 먹고 자란 칙칙한 70년대생이라 그런가 구수하다 아니다 뭐 그 정도지..
그리고 한 가지 더 보태자면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이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한 입 먹고 어린 시절의 추억 속 시간으로 돌아가 버린 것처럼,
와인을 마시고 홍차를 마시고 커피를 마시면서 옛 추억 속 맛들을 기억해 내곤 한다.

 
홍해 블랜드가 내 스무 살 시절 낙엽 태우던 그 가을로 되돌려 놓았다면
브리카로 뽑은 에디오피아 예가체프는...

예가체프는 더치 커피로만 그리고 커피술로만 마셔보았지 따뜻한 커피로는 만나본 적이 없었더랬다.
나의 커피에 대한 탐닉은 탐닉을 넘어 탐욕의 수준으로까지 넘어왔으니..
언젠간 마실거잖아..란 심정으로 사제껴 놓은 커피만도 십수어 종류..게중엔 뜯지도 않은 커피도 여럿...
그러니 카페 뮤제오에서 시음용으로 보내 온 예가체프에게까지 눈길 줄 여력이 없었던게다.

 
또 한가지 보태자면 심한 가을병 투병 중 프렌치프레스로 추출한 홍해 블랜드가 거의 비상 상비약 수준이었으니
예가체프 이하 여러 커피들아 미안..이제 나의 가을병 다 나았으니 너희들도 음미해 주마. 후훗..

시음용으로 받은 커피 중 봉투를 만지작 해 보니 분쇄된 커피가 있길래 보니 예가체프..
크룹스 반자동 머신에 에스프레소 롱고로 뽑아 마셔 보았더랬다. 별 감흥 없었다.
어디선가 군고구마향 어쩌고 하던 걸 읽어 보았는데 난 암것도 못 느끼겠더라.

그런데 반전은 며칠 후...

나의 깊은 가을병을 염려한 친구가 멀리서 나를 걱정하며 가게로 찾아왔다.
브리카를 꺼내 예가체프를 토닥토닥 달래어 다져 넣고 커피를 추출했더랬다.
친구에겐 라떼를 만들어 주고 나는 아주 약간의 물만 타서 한 모금 한 순간...
''어머 oo아~~ 커피에서 군고구마맛이 나...''

이제 예가체프 한 모금 입에 머금고 <잃아바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처럼 나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볼까나?

 

나의 외할머니는 올해 97살.. 물론 살아계신다..
5살난 내 조카 이승재군이 ''쪼꼬맣고 쪼글쪼글한 온수동 할머니''라 부르는 조그맣고 쪼글쪼글하지만 정정하신 우리 외할머니... 후훗

내가 왜 갑자기 97살 난 외할머니를 불러 들이는 걸까?
예가체프에서 외할머니를 연상했다고?
아니..설마 그겋게 싱거울 정답을 내어 놓을려고 비싼 우리 외할머니를 불러들였을까?  뭐 어찌보면 맞긴 하다만...

97살.. 정정하시다고는 하나 노안에 백내장으로 뿌연 눈으로도 한시도 가만히 안 계시고
부지런 부지런 꼼지락 꼼지락 이모네 살림살이 건사하시시는 외할머니..
지금으로부터 20여년쯤 지금보다 훨씬 정정하실 땐 오죽하셨을까?
 

그런 우리 외할머니의 가을 겨울은 뜨개질 바늘로 늘 무언가 떴다 풀렀다하는 것이 소일거리이자 주일거리였던 것 같다.
떴다 풀렀다 떴다 풀렀다..나중엔 꼬불꼬불 생라면보다 꼬불해지는 털실을
할머니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펄펄 끓는 주전자에 통과시켜서 새실로 만드는 마법을 부리곤 하셨다.
그럼 난 옆에서 군고구마나 까먹으면서 "할머니 고거 말고 새로 이쁜 색실 사서 나 조끼 하나만 떠주면 안 돼요?" 내지는
"할머니! 아부지가 나에 대한 애정이 식었나봐. 예전엔 군고구마 사서 식을까봐 가슴에 품고 오시더니 

요즘은 그냥 달랑달랑 들고 오셔서는 군고구마가 찹찹해요."라고 쉰소리나 하고 있었으니..

 

그렇다.

브리카로 뽑은.. 그리고 브리카로 뽑아 뜨거운 물을 아주 약간 섞은 예가체프는
그 옛날 포실포실한 뜨개실과 주전자에 물 끓는 소리,
독일물 10년 먹고 세련된 지금보단 덜 쪼글쪼글한 외할머니
그리고 군고구마나 까먹으며 쉰소리나 해대던 나의 그 잃어버린 시간을 찾게 해 주었더랬다.
내 이제껏 그 시절만큼 맛난 군고구마는 먹어본 적 없고
이 브리카로 뽑은 예가체프는 나를 그 시절로 고스란히 데려다 주었으니,
지난 가을병 투병 중 홍해 블랜드를 그리도 열심히 마셔대더니 올 겨울엔 얼마나 또 그만큼 예가체프를 마셔댈까?

 

올 겨울 브리카와 예가체프 이고 지고 서울로 올라 가 달디 달고 맛난 라떼 한 잔 만들어 할머니와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 꽃이나 좀 피워 봐야겠다.. 

"할머니 왜 그때 으니년 조끼만 떠주고 난 왜 안 떠준거에요? 씨~잉" 되도 안 한 투정도 좀 부려가며..

 

 

총 댓글 3 추천 : 0 추천하기 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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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블리 아련

    얼마전 사주를 보러 갔더랬죠
    거기서 저보고 서른 일곱에 시집 갈거라 그래서 절규했단 말은 일전에 했던 것 같고...
    한 가지 또 와 닿던 말..
    글솜씨가 있으나 정리가 안 되어 끝을 못 본다
    정리가 안 되어,..
    정리가 안 되어..
    끝을 못...
    울컥
    눼..으찌나 맞는 말이던지..
    정리가 안 되어 끝을 못 보고 있는 독후감들 하며, 각종 시음기하며..
    그러니 소설가는 무리데쓰!!
    2009-11-06 20:37:23

  • 한혜정

    아련님 글 보면 소설가 하셔도 되겠다는 생각이 가끔 든대니께요 ㅎㅎㅎ
    예가체프... 더치용으로만 한번 내려보고 드립용으로 마실려고 원두 받아놨는데 정작 브리카로는 못먹어봤네요 ㅎㅎ
    2009-11-06 20:09:53

  • 라니

    추억이 방울방울...
    딱 어울리는 제목같아요^^
    2009-11-09 00: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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