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후기
데미타세
약 2주 전, 소나기를 계기로 거의 1년만에 일리 전문점에 갔었습니다.
(좀 웃긴게, 저는 '일리 따위, 병약한 척 연기하는 귀부인처럼 매가리가 없어서별로...'같은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고 마냥 찬양하는 편이지만,최근까지 '원두 사다 브리카로 내리면 되는데 뭐하러...'라는 생각으로기회가 있어도 일리를 쓰는 커피점은 피했는데,
막상 원두도 비싸다고 안 산다는 겁니다.-_-) 온통 일리 천지 입니다.
깡통들은 당연히 종류별로 진열되어 있고 3kg짜리 업소용 대형 일리캔을 통째로 꽂아서 쓰는 전용 그라인더라던지 완전 평면이라 젓는 용도로만 쓸 수 있는 일리 티스푼,
일리 로고가 인쇄된 막대 설탕 등- 무엇보다도 역시 일리 하면 '일리 컬렉션'으로 유명한 전통의 에스프레소잔을 빼놓을 수가 없겠죠.
사실 제가 데미타세에 처음 관심을 갖게된 것도 일리 로고잔을 접하고 나서 였습니다.
그 전엔, '어차피 순식간에 마셔버리는 에스프레소인데 굳이 유난을 떨 필요가 있나'고까지생각했었고-
어렸을 때 더블에쏘잔 비슷한 사이즈의 머그를 선물 받은 적이 있는데 그 때는 에스프레소를 아예 몰랐는지라 이건 도대체 어디에 쓰라고 만든걸까 궁금해하며
그냥 장식으로 두다 브리카 사고서 비로소 잔으로 잘 쓰고 있어서 별로아쉬울게 없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별다방도 이런걸 쓰더군요.)
그러다 우연히 일리 전문점을 발견하고 처음으로 일리잔에 에스프레소를 받아 봤는데 애가 참 동글동글 똘망똘망하게 생겼더라구요.
그런데 손잡이가 구멍은 나있되 손가락 들어갈 틈이 없는 겁니다. 이쁘긴 하지만 불편하겠다 싶었는데 막상 손가락 세 개로 살짝 들어보니까 딱 맞는 것이
정말 편하더라구요.단박에 반해 버렸습니다. (티스푼도 참 맘에 들었는데, 이 때가 막 일리 티스푼이 비대칭 형태에서 지금의대칭형으로 넘어가던 시기 였습니다. 지금도 이쁘지만 그 전 디자인이 참 근사했는데요새는 보기 힘들어서 그 때 안사둔걸 살짝 후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의 생각으로는) 필요도 없는 커피잔에 거의 2만원을 쓰는건(당시 얼마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나는데 1만원대 후반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손이 떨렸고,
무엇보다도 브리카에 쓰기엔 좀 작아 보여서 용케 지름신을무시할 수 있었습니다.
그후로도 브리카 덕분에 종종 찾아오는 지름신과의 싸움에서 승승장구 했지만 어느 날 복병이 등장 하더군요.
'비알레띠 미니 익스프레스'
뭐든 용서될만한 파격적인 디자인에 잔을 데워주는 기능까지 갖춘데다 커피도 진하게뽑아준다니, 커피돼지 브리카를 보완해줄 포트가 필요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당장 지르기로 작정했는데, 이게 1인용인데다가 '무조건' 작은 잔이 필요한디자인인 겁니다.
드디어 '어쩔 수 없이' 데미타세를 구입할만한 결정적인 핑계가생겼습니다! 그런데 결국 제가 구입한 것은 일리가 아니고 안캅의 에덱스에다 그림을 입힌 비아지오 였습니다. 일리 로고잔이 너무 비싸다고 투덜댔던 저는 결국 그보다도훨씬 비싼 잔을 덜컥 사버렸습니다. 막상 사려고 보니까 일리 로고가 별로 맘에 안들더군요.
그리고 안캅 등의 데미타세들도 디자인이 뒤지지 않다는걸 깨닫기도 했구요.
아예 저렴한 라바짜로 갈까도 심각하게 고민했었는데, 그 쪽은 로고가 더맘에 안들었습니다.(참고로, 가격 대 기능을 최우선으로 했을 때 라바짜 데미타세는 강력하게
추천할만한 물건 입니다. 사실 디자인도 그리 떨어지지 않구요. 충분히 두툼하고 내부의 곡면도 잘 빠졌고 손잡이도 편하고-제조사가 (무려) 안캅 혹은 IPA인데, 안캅 쪽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지만일리 데미타세도 IPA에서 만듭니다. 그럼에도 가격이 일리의 절반도 안 됩니다.)
결과적으로 이 쇼핑은 참담한 실패였습니다. 잔 자체는 괜찮았습니다. 크기에 비해 믿기 힘들 정도의 무게감과 두께, 완벽한곡선, 매끄러운 질감, 돌려가며 한참 들여다보게 만드는 정교한 페인팅에안쪽 윗부분에 예쁜 폰트로 쓰여진 문구, 단순한 손잡이 모양 등-
하지만 미니가 문제였는데, 확실히 모카 보다 꽤 진하게 나오긴 하지만 역시 브리카 보다는 한없이 모카에 가까웠습니다.(지금은 좀 달라졌지만 이 때의 저는 브리카 지상주의자 였습니다.)
게다가 미니는 추출 끝무렵에 커피 방울을 흩뿌리는 묘기를 보이더라구요. 막 사방으로 튀는 정도는 아니라 별 문제는 아니었지만 잔이 괜히 지저분해지는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귀여운 금빛 관에서 맛있는 커피가 흘러나와 예쁜 잔에 보기좋게 담기는 환상이 살짝 일그러져 버리고 커피맛도 떨어지게 느껴지다보니 결국 미니는 창고행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몇 달 안쓰다 최근에 다시 쓰고 있습니다.)
미니가 천덕꾸러기가 되어 버리자 자연히 비아지오 데미타세도 쓸데가 없어져버렸습니다.
어디까지나 미니 전용으로 생각하고 산거라 70ml라는 용량이딱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와서 이걸 브리카에 쓰긴 무리고-
그렇게 비아지오가 장식용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을 때 문득 미니 말고도비슷한 양의 커피를 추출하는 도구가 또 있다는걸 깨달았습니다.
바로 에스프레소의 할아버지격인 터키쉬 커피를 만들 수 있는 이브리크였죠.(사실은 뚜껑과 관이 없는건 쩨즈베/쎄즈베/체즈베 라고 부르는게 맞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오직 비싸고 예쁜 잔을 써먹기 위해서 터키쉬 커피를 다시 만들어 먹는상황에 이르렀습니다.(그러다 뜻밖에 데미타세의 또다른 기능을 알아냈습니다. 원래 잔 내부의 근사한 곡면은주로 머신에서 커피를 직접 받을 때 튀지 않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잔에커피찌꺼기가 섞여있는 터키쉬 커피를 붓고 기다리면 미분이 제대로 가라앉더군요. 예의 원통형 미니 머그를 사용할 때와 달리 미분이 자연히 바닥에 둥글게 뭉치더라구요.)
사실 이 지경이 되었어도 별로 후회는 안했습니다. 역시 예쁘면 모든게 용서가 되니까요.
지금은 미니를 다시 쓰게 되면서 잘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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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계 종사자''와 ''수집가''인 분들이 공감할만한 내용이 있으려나요.;;;;
잔 구입할 때 뮤제오에서 판매하는 전 제품의 디자인을 일일이 따져봤는데 잔받침은
신경도 안썼네요. 지금 다시 보니까 마담 시리즈 등은 움푹 들어간 부분이 한쪽에
치우쳐 있다던지 잔에 따라 다 개성이 뚜렷하네요. 덕분에 시야가 넓어졌습니다.
이제는 전보다 제품이 늘어서 선택의 폭이 넓어졌는데, 그냥 나중에 살걸 하고 (별로
현실성 없는) 후회를 하곤 합니다. 최근에는 ''레알레''가 맘에 들어요. 단순한 맛이
없는게 걸리지만 곡선이 예쁘면서도 특별히 두툼한 바닥과 살짝 말린 입술 부분,
잡기 편해 보이는 손잡이 등이 기능적으로 보입니다. 2008-05-26 00:50:00
주말을 쇠고 느지막히...점심 먹고 커피 한 잔 마시며 들어와보니
반가운 댓글을 주셨네요^^
(전 수집가는 아니지만)
레알레를 좋아해요, 저도.
레알레는 어찌보면 기교가 없다는 점에서 편안한 아줌마 스타일 아닌가요?
편안하면서도 좀 이쁜 아줌마 ㅎㅎ
레알레는 지금 쓰고 있으신가요?
최근, 까뮤의 컵 앤 글라스 코너에 들어갔다가
새로 입고된 잔들을 봤는데, 마음에 들더군요.
카페리쳐드 잔들인데, 펠르누와와 플로리오 두 종이 있더군요.
블랙앤화이트의 대비도 좋았고..모양도 매끈하더군요.
안캅의 데미타세 중 토리노 잔과 아주 비슷한 라인같아요. 아주 여성스런 라인이랄까.
오늘도 데미타세 수다 떠들다 갑니다. 안녕히~
2008-05-26 13:26:00
광진님. 위 글을 올리고 나서야 <바로가기>를 보았네요.
이런..이런...
저를 그냥 수집가로 콱! 찍어놓고야 마는군요.
까뮤 물건 좀 팔아줄려고 기획했던건데.
그런데 저 붙인 그림을 아주 자세히~ 보시면, 뒷배경이 달라지는 걸 보실 수 있어요.
두 그림 사이의 시간에 제가 사무실 방을 옮겼거든요. 그 그림을 보니 갑자기 지난 시간이 휘리릭 떠오르네요. 2008-05-26 13:29:00
저도 재밌게 읽었습니다.
저도 제목을 붙여보자면 <데미타세와 나>
전 매사에 슬렁슬렁 너무 고민하지 않고 일들을 헤쳐나가는 성격이라
데미타쎄 하나로 이리 심각한(?) 고민을 하여 보진 않았지만 말이지요.
저는 미니는 없고, 브리카와 저 비아지오는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저 취향으론, 받침이 마음에 안 들어요. 너무 기교적인 받침이랄까. 안캅 더블에쏘잔에 저 비아지오의 그림이 입혀진다면 아마 꼭 사게 될 거 같아요. 70밀리는 아무래도 너무 적은 용량이예요.
광진님..재밌는 글 더 자주 기대해도 되죠?
2008-05-22 10:27:00
'데미타세를 찾아서...'라고 제목을 붙여도 좋을 멋진 에세이!
중간중간 공감의 끄덕끄덕... :-)
@ 그나저나 미니를 위한 잔은 그 물고기잔이 정말 제격인듯 하던데요? 2008-05-21 16:11:00
'업계종사자' 꽈당-;;
글 읽고서도 저를 지칭하는 것지 반신반의하다가 경미님 글 읽고서야 하하...;
실은 이번 도자기 전시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2008-05-28 14:18:00